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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바랜 신진서의 '12연승'
정관장 황진단, 최하위 신안천일염에 덜미
  • [KB바둑리그]
  • 바둑리그 2016-10-02 오전 7:28:28
▲ 공배 없이 330수. 장장 4시간 37분에 걸쳐 진행된 장고대국에서 이창호 9단이 신민준에게 막판 대역전패를 당했다. 마지막 석 집짜리 패를 하는 도중 승부패를 걸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2016 KB국민은행 바둑리그 15라운드 3경기
신안천일염, 소금 대신 고춧가루 폭탄...정관장 황진단에 3-2 승

"잠시 후 정관장 황진단 김영삼 감독과 신진서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팀 스코어 2-2 상황에서 이창호 9단과 신민준의 최종국이 결말에 다다랐을 즈음 바둑TV 진행요원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정관장 황진단의 3-2 승리가 확실한 만큼 대비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들렸다.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해 밤 11시를 훌쩍 넘긴 장고대국은 마지막 석 집짜리 패 싸움을 지속하며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국가대표팀은 이미 이창호 9단의 1집반 내지 2집반 승리가 확실하다는 진단를 내린 상태였고, 몇 수 지나 종국이 되면 정관장 황진단의 선두 복귀와 주장 신진서의 12연승 소감을 듣는 인터뷰가 진행될 터였다.

한데 이 판이 뒤집어진다. 이창호 9단이 끝내기 석 집짜리 패를 하다가 돌연 승부패를 걸어가면서 전판이 아수라장이 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 느닷없는 사태에 퇴근을 앞두고 있던 국가대표팀은 '헬프 미'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준비하던 김영삼 감독 역시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종국을 얼마 앞두고 긴박한 사태가 펼쳐지자 국가대표팀과 신안천일염 검토진이 한데 어울려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왼쪽 두 번째 신진서의 뒷모습도 보인다). 이후 상전벽해의 바꿔치기가 거듭된 결과는 신민준의 백 5집반승. 승리와 동시에 선두 복귀가 예정돼 있었던 정관장 황진단에겐 이 결과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승자 인터뷰 역시 바로 취소됐다.



▲ ●이창호 9단 ○신민준 2016 KB국민은행 바둑리그 15라운드 3경기 1국(장고 대국).

신민준이 좌상쪽 백1로 패감을 썼을 때 우변 흑2로 승부패를 걸어간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패착. 가로 받아두고 순리대로 마무리했으면 미세하나마 흑승이었다('아직은 정복하기 힘든 산, 신산'이라는 국가대표팀의 확신에 찬 메시지는 종반의 이 사태에 황급히 '정복하지 못할 산은 없다'로 바뀌었다).

중계석의 이현욱 해설자는 "미스테리한 상황이다. 이 9단에게 뭔가 착각이 있었던 듯하다"라는 말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한 다음 "오늘 당사자인 이 9단이나 김영삼 감독이나 잠을 못 이룰 것 같다"고 안타까 운 심정을 전했다.


이날의 승부는 2위팀과 최하위팀의 대결 답지 않게 시종 엎치락뒤치락했다. 우선 대진부터가 정관장 황진단이 나빴다.

주장 신진서와 이창호 9단만이 상대 전적에서 근소한 우위를 점했을 뿐 나머지 김명훈과한승주, 박진솔 세 명은 각각의 상대에게 한 판도 이기지 못한 대진이었다. 이로 인해 지난 두 경기를 연속해 5-0으로 장식한 정관장 황진단으로서도 고전하는 흐름이 됐고, 경기 역시 누가 이길지 모르는 풀세트 접전으로 치달았다.


▲ 상대의 돌에 다섯 번이나 붙여가는 과감함을 보여준 신진서. 이 기세에 눌렸을까. 이호범에게서 대착각이 나오면서 급전직하 승부가 기울었다(240수 신진서 백 불계승).
이날까지 12차례의 승리가 모두 불계승이고, 그 중 200수를 넘은 판이 세 판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권투로 치면 타이슨이요, 격투기로 말하면 효도르다. 이현욱 해설자는 "이런 엄청난 확신, 자신감을 갖고 있는 기사는 이세돌 말고 본 일이 없다"고.


'불패의 주장' 신진서가 시작하자마자 12연승의 축포를 쏘아올렸지만 곧장 신안천일염의 조한승, 이세돌 원투 펀치에게 내리 승점을 허용했다(신안천일염 2-1 정관장 황진단). 후반은 정관장 황진단의 끈끈한 뒷심이 발휘되며 재역전이 이뤄지는 분위기였다.

먼저 5지명 박진솔이 상대 전적 3전 3패로 밀리고 있던 목진석을 상대로 회심의 동점타를 날렸다. 시작부터 초슬로우 템포를 보였던 장고대국은 이창호 9단의 우세가 확실했기에 정관장 황진단은 결과만 안 나왔을뿐 승리한 거나 다름 없었다. 한데 이것이 뒤집어질 줄이야.


▲ 농심배 첫 판 패배의 아픔을 딛고 김명훈을 158수 단명국으로 제압한 이세돌(시즌 5승4패). 10월 1일 현재 통산 105승 41패(71.9%)로 2004년 바둑리그가 생긴 이래 승률 7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기사다.


10승째를 수확하며 선두 복귀를 꿈꿨던 정관장 황진단은 9승5패가 되면서 2위 자리에 머물렀다. 두 경기 연속 영봉승의 기세가 한풀 꺾였음은 물론 신진서의 찬란한 12연승도 빛이 바랬다.

반면 신안천일염으로선 오랜만에 맛보는 꿀맛 같은 승리였다. 이날 이겼어도 4승9패로 순위는 여전히 최하위. 하지만 우승 후보 정관장 황진단을 상대로 4연패의 사슬을 끊으며 자존심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후의 행보에 따라선 중위권까지 넘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농심배 첫판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이세돌이 김명훈을 상대로 쾌승을 거둔 것도 조금은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 경기 전 조한승에 대해 "자신과 기풍이 영 상극이다"라며 씁쓸함을 보였던 한승주(오른쪽). 상대 전적 4전 4패가 5전 5패로 이어지며 최근 5연승의 기세가 멈췄다.


2일엔 나란히 5승7패를 기록하고 있는 5위와 6위, 화성시코리요와 한국물가정보가 15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벌인다. 여기서 지는 팀은 사실상 탈락, 반면 이긴 팀은 실낱 같은 포스트시즌의 희망을 살릴 수 있기에 외나무 다리의 혈투가 예상된다.

대진은 박정상-한태희,이영구-원성진,김정현-백홍석,홍성지-홍민표,안조영-안국현. 전반기엔 화성시코리요가 한국물가정보를 3-2로 이긴 바 있으며, 빅매치인 이영구-원성진의 주장 맞대결은 전반기(이영구 승)에 이은 리턴매치다.

9개 팀이 더블리그를 벌여 상위 네 팀이 포스트시즌에 올라 최종 순위를 다투는 2016 KB국민은행 바둑리그의 팀 상금은 1위 2억원, 2위 1억원, 3위 6,000만원, 4위 3,000만원. 상금과는 별도로 매 대국 승자는 350만원, 패자는 60만원을 받는다.


▲ 목진석에게 3전 3패를 당하다가 첫승을 거둔 박진솔(왼쪽). 이번 시즌 최강의 5지명답게 다승 5위(9승5패)에 이름을 올렸다.









▲ 2경기를 남긴 정관장 황진단은 16라운드에서 Kixx와, 17라운드에선 SK엔크린과 차례로 대결한다.



▲ 신진서와 이호범의 복기를 유심히 지켜보는 이세돌. 2009년의 휴직 파동 이후 올해처럼 굴곡이 많았던 해가 또 언제였나 싶다. '혁명아'냐 '말썽꾼'이냐의 논란 또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신안천일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 없이 나타나 쿠키를 선물하는 두 여학생이 처음 카메라 앞에 앉았다. 왼쪽이 경기도 성남에 사는 최서영양(중3), 오른쪽이 대전서 올라오는 언니뻘 육다은양(고3)이다(바둑리그 검토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된 육양은 이날 방송 인터뷰도 했다).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가 이세돌 9단의 알파고 대국을 계기로 알게 된 다음 친자매 이상이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