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내내 봄처럼 포근했던 날씨, 2월의 마지막 월요일 아침 공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승부의 계절' 포스트시즌의 시작을 하늘도 알고 있는 걸까. 2025-2026 KB국민은행 바둑리그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가 23일 한국기원 신관 1층 라운지에서 최유진 캐스터의 진행으로 열렸다.
정규리그 1위 울산 고려아연, 2위 원익, 3위 한옥마을 전주, 디펜딩 챔피언 영림프라임창호.
지난 넉 달의 정규리그가 남긴 숱한 드라마를 뒤로하고, 이제 끝내기만 남았다. 저마다 정규리그 성적표는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4팀의 감독과 대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2025-2026 KB국민은행 바둑리그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가 열린 가운데 정규리그를 통과한 4팀 감독·선수들이 취재진 앞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 '0표 1위' 울산 고려아연, "기적의 시나리오 완성할까"
이날 미디어데이의 이목은 '0표의 기적' 울산 고려아연으로 쏠렸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감독·주장 16명 대상의 우승팀 예측 설문 결과는 원익 16표, 영림프라임창호 15표, 영암 14표 순이었다. 신진서의 이적으로 주목받은 영암, 디펜딩 챔피언 영림프라임창호, 국가대표 4명을 보유한 원익이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심지어 한옥마을 전주·수려한 합천·GS칼텍스도 각각 5표를 받은 터. 울산 고려아연을 언급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이 팀은 개막 3연패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그다음이 달랐다. 파죽의 10연승. 최종 라운드가 자정을 넘긴 뒤에야 포스트시즌 진출 4팀의 순위가 가려질 만큼 치열했던 정규리그에서 울산 고려아연은 당당히 1위로 이름을 올렸다.
1위 소감을 묻자 박승화 감독은 "시즌 초반 연패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줬기에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엄청난 성적을 보여준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공을 선수들에게 돌렸다.
▲ 포스트시즌 출사표를 밝히고 있는 울산 고려아연 박승화 감독(오른쪽 두 번째)
10연승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주장 안성준은 "팀의 아낌없는 지원 속에 원팀 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가다 보니 이런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며 "정규리그 1위지만 도전자라는 마음으로 챔피언 결정전을 준비하겠다"고 겸손하게 임전 소감을 밝혔다. 울산 고려아연은 2년 만에 다시 정상 도전에 나선다.
▲ 끈끈한 팀워크가 울산 고려아연의 강력한 무기라고 밝힌 주장 안성준(왼쪽)
■ '홍일점의 반란' 김은지, "원익의 3년 묵은 한 풀겠다"
포스트시즌을 앞둔 원익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3년 연속 정규리그 1위→2위→2위. 매 시즌 상위권을 지켰지만 우승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 지난 시즌엔 정규리그 2위에서 오히려 한 계단 내려앉은 채 포스트시즌을 마쳤다.
이희성 감독은 "우승에 대한 부담을 내려놨다. 우승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만큼 하늘에 맡기겠다.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고, 선수들이 후회하지 않는 바둑을 두기를 바란다"며 담담하게 소감을 밝혔다. 마음을 비웠다는 이희성 감독에게 사회자가 플레이오프에 어느 팀이 올라오면 좋겠냐는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개인적으로 한옥마을 전주"라는 속내를 슬며시 드러냈다.
▲ 원익 4지명 김은지(왼족)와 이희성 감독
8승 3패의 호성적에도 3경기 결장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김은지는 "우리 팀이 항상 우승 문턱에서 우승을 놓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 열심히 준비해서 꼭 우승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 포스트시즌 상대로 언제나 용병 선수들과 대국하고 싶다고 밝힌 '겁 없는 MZ 여제' 김은지
■ '당당한 주연' 강유택, "PS서도 팀 캐리할까"
이날 미디어데이에서 가장 많이 호명된 이름은 참석하지도 않은 강유택이었다. 정규리그 10전 전승. 단순히 많이 이긴 선수가 아니라, 바둑리그 23년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내러티브를 만든 주인공이었다.
"첫 경기를 치를 때 검토실에서 강유택 선수가 안정감 있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며 준비된 선수라 생각했다. 모든 경기를 승리한 강유택 선수의 활약은 경이로웠다. 우리 팀 선수들도 처음에는 고마워하다가, 그다음엔 존경의 눈빛을 보이다가, 마지막에는 질투할 수준까지 이르렀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유택의 엄청난 활약에 찬사를 아끼지 않은 양건 감독은 "시즌 막바지 중요한 승부에서 선수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마무리를 잘한 만큼 포스트시즌에서도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 한옥마을 전주 주장 변상일(왼쪽)과 양건 감독
▲ 정규리그 마지막 판을 이긴 기운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고 밝힌 한옥마을 전주 주장 변상일
■ '300경기의 사나이' 강동윤, "디펜딩 챔피언의 귀환 이룰까"
영림프라임창호는 올 시즌 연패와 연승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험난한 시즌이었지만 결국 포스트시즌 무대에 다시 섰다.
박정상 감독은 "올 시즌 마음을 비우고 시작했는데 막판에 욕심이 생겼다"며 "통합 라운드를 앞두고 1위를 확정한 울산 고려아연 송규상 선수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딴판이었다"고 웃음 섞인 소회를 밝혔다. 이어 "전주와 원익이 길을 터주면 울산 고려아연에게 복수하러 달려가겠다"며 우승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 영림프라임창호 주장 강동윤(왼쪽)과 박정상 감독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강승민을 '지뢰'에 비유했던 박정상 감독에게 그 발언에 대한 복기를 주문하자 "개막 당시 고점은 높은데 기복이 심한 선수라고 했더니, 강승민 선수가 화가 났는지 아군을 향해 터트리더라. 그러나 강승민 선수가 목표를 잡고 집중하면 주장이든 용병이든 언제든지 꺾을 수 있는 만큼, 포스트시즌에서 고점에 큰 기대를 걸겠다"며 변함없는 믿음을 드러냈다.
주장 강동윤은 이번 시즌 바둑리그 사상 최초로 통산 300경기 출전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20시즌 넘게 리그를 지켜온 산증인이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2연패를 노린다. 또한 영림이 우승을 달성하면 2016년 티브로드 3연패 이후 9년 만에 바둑리그를 연속 제패하는 팀이 된다.
▲ "개인적으로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처음에는 재미있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전했는데, 지금은 부담과 책임감 속에 팀원들을 이끌고 있다. 팀도 개인도 잘해서 앞으로도 많은 경기에 출전하고 싶다."고 300경기 출전에 대한 감회를 밝힌 강동윤
■ 강력한 용병 총출격 예고, 28일 준플레이오프 팡파르
랴오위안허(울산 고려아연), 진위청(원익), 양딩신(한옥마을 전주), 당이페이(영림프라임창호). 강력한 용병을 보유한 4팀 감독들은 가능한 한 용병을 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도 구체적인 전략 노출은 영업 비밀이라며 밝히길 꺼렸다.
마지막으로 우승 공약 릴레이가 이어졌다. 영림프라임창호 박정상 감독의 "대학생 바둑인들과 어울리는 자리", 한옥마을 전주 양건 감독의 "다 같이 전주 비빔밥 파티", 원익 이희성 감독의 "남녀노소 많은 분들과 함께하는 좋은 시간", 울산 고려아연 박승화 감독의 "울산 팬분들과 함께 소통하는 시간"까지 각자의 색깔만큼 다양한 공약을 내걸었다.
▲ 포스트시즌 진출 4팀 감독·선수 8명이 한자리에 모여 왕좌를 향한 뜨거운 각오를 다지고 있다.
오는 28일(토) 포스트시즌의 첫 총성이 울린다. 3위 한옥마을 전주와 4위 영림프라임창호의 준플레이오프. 전주는 어드밴티지 1승을 안고 있는 반면, 영림은 반드시 2승을 따내야 살아남는 구도다. 이어 3월 21일 플레이오프에서 준PO 승자와 원익이 격돌하고, 3월 26일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 고려아연이 최후의 상대를 맞는다.
0표의 기적을 쓴 팀, 10전 전승의 신화를 만든 선수, 300경기의 사나이, 그리고 홍일점의 반란.
정규리그의 서사는 끝났다. 살아남은 4팀만이 마지막 전쟁에 나선다. 왕좌를 차지할 팀은 단 하나다.